우리가 신앙활동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예배보러 가는 것>과 <예배에 참석하는 것>, <예배에 출석하는 것> 그리고 <예배드리러 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도대체 예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예배를 드리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예배에 대해 목마르게 하는가? 예배 - (Worship / Gottesdienst) 는 신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존경하며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결단하는 신앙공동체적 행위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부터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대중예배의 장식과 의식을 지나치게 멋있게 보다 예술적으로 프로그래밍 하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예배드리러 오는 신도를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儀式(의식)은 살고, 예배는 죽었기 때문이다. <챠드 월쉬>는 “21세기의 덜 자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의 신앙활동은 희미한 경건이며 거룩한 잠꼬대다. 신앙은 지성과도 분리되었고, 의지와도 멀어진 감정적 흥분상태에서 감상적인 자장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 예배는 예배의 정신 - 예배의 참뜻이 살아야 진정한 예배이다. 예배를 예배답게 이루려는 마음가짐 -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어떠한 예전(禮典, Liturgy), (예배행사)나 <형식>도 결코 예배를 위한 근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예배에 있어 의식(儀式)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예배의 참뜻, 정신을 살려주는 한낱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가 목적이 되면 예배는 죽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야 하는가? “예배보러”, “예배 참석하러”, “예배 출석하러”가서는 안 된다. 뛰어난 신약학자요 하나님 말씀의 능통한 해설자인 위리엄 바클레이 (Barclay)는 이렇게 예배를 준비하면 -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세 가지 큼직한 조건을 제시하며 약속했다. ① “예배를 위해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갖춘 후 교회로 가십시오.” - 주일 날 ‘서둔다’는 말은 신도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자세요 표현이다. 예배를 위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서둘러’출발하고 ‘서둘러’ 이미 예배시간이 시작한 뒤에 허둥지둥 겨우 자리에 앉는 것 부터가 예배를 통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예배전에 미리 마음을 쪼개여 옥합을 드릴 준비를 하라. ②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면서 교회로 가십시오” - 교회가는 일이 고통과 부담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에 임하는 일이 단순한 습관, 무거운 의무감, 희미한 경건의 표시로 일관 된다면, 당신은 예배에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믿음에 성공하려는 비결은 도대체 나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고 사모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그런 마음이 바로 예배정신이다. ③ “나의 모든 것을 바칠 결의를 품고 교회로 가십시오.” - 구약성서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예배의 형태는 희생이었다. 우리가 교회에 갈 때 무엇인가 얻을 생각만 하면서 나의 기도, 나의 재물, 나의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드릴 결단을 안고 교회로 가야한다. 비록 우리는 육신만을 가지고 교회에 갈지라도 믿음과 사랑과 헌신과 기도를 가지고 간다면 그 예배가 얼마나 아름답고 살아있는 제사가 될까! 예수님은 예배를 신령과 진리로 드리라고 가르쳤다. 형식과 의무로써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과 내면적 주체성으로써 예배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예배의 참뜻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예배이어야 하는가? 예배는 우리의 <역사속의 사건>이다. 우리들 이웃에 사는 지극히 작고 억눌리고 멸시받는 버림받은 <여리고의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 가서, 그들을 돌보고, 사랑하겠다는 결단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