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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에 해당하는 글266 개 |
2010/09/05 찬송하는 소리 있어 기쁘다. (2)
2010/08/29 주여, 우리는 눈멀고 벌거벗은 거지들입니다. (1)
2010/08/22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2)
2010/08/15 기독교의 상징색(色) (1)
2010/08/08 당신의 감옥 (1)
2010/08/01 섬기는 종으로서의 자리뿐이다. (2)
2010/07/25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2)
2010/07/18 경건한 삶을 위하여 (3)
2010/07/11 신앙적 서캐디안 리듬 (1)
2010/07/04 아인슈타인의 신앙고백과 그 교훈 (2)
2010/06/27 칭찬도 배워야 할 예술이다. (2)
2010/06/20 지금 당신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2)
2010/06/13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 (1)
2010/06/06 잠잠하고 신뢰해야 힘을 얻습니다. (2)
2010/05/30 고상한 그리스도인 (1)
2010/05/23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조심하라 (2)
2010/05/16 주라, 그리하면 부유하리라 (1)
2010/05/09 그들은 죽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3)
2010/05/02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1)
2010/04/25 꽃이 꽃으로 피고 피우기까지 (2)
2010/04/18 기도는 하나님께 듣는 일입니다. (2)
2010/04/11 불타오르는 마음으로 ˝아멘˝ 합시다. (3)
2010/04/04 믿음은 하나의 시각(視角)이다. (2)
2010/04/04 2010년, 부활절을 생각한다. (1)
2010/03/21 ‘일곱’이라는 말과 성서의 상징주의 (1)
2010/03/14 바꿔 쓰기 거꾸로 읽기 (1)
2010/03/12 월트 부르구만 Walter Brueggemann 과 싯적 상상력 (3)
2010/03/07 시간의 비밀을 알고 있다. (1)
2010/02/28 기본이 서야 길이 열린다. (2)
2010/02/21 우리 모두가 약한 자들일 뿐입니다. (2)
2010/02/14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2)
2010/02/07 그리스도의 덕(德 Edifying)을 세우십시오. (1)
2010/01/31 거친 질문도 견인(堅忍)의 선물입니다. (1)
2010/01/24 뜨거운 관심과 겸손한 무릎 (2)
2010/01/17 저를 이끄시니, 저가 여기 있나이다. (5)
2010/01/10 타이거 우즈는 왜 방커에 빠졌을까? (1)
2010/01/03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십시오. (3)
2009/12/27 맑은 영혼이 오래 넘쳐나게 하옵소서 (2)
2009/12/20 크리스마스 사건 (2)
2009/12/13 영혼의 자세 (2)
2009/12/06 똑똑한 바보 (3)
2009/11/29 오-매 예수 단풍 들었네요. (1)
2009/11/22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겠습니다. (4)
2009/11/15 감사할 이유들
2009/11/08 경건(敬虔)과 Church Face (1)
2009/11/01 거룩한 도둑놈들 (1)
2009/10/25 웃은 죄 밖에 없습니다. (1)
2009/10/18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2009/10/04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는가? (6)
2009/09/27 바보같은 질문 (1)
2009/09/20 알버트 시바이쩌 박사님!
2009/09/13 두 여인의 향기
2009/09/06 거룩한 부채(負債)
2009/08/30 조팝나무에 핀 효도꽃
2009/08/23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2009/08/16 황금률(黃金律)
2009/08/09 언제까지 주어야 합니까?
2009/08/02 주인과 종 (1)
2009/07/26 심판을 증거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
2009/07/19 믿음은 좋은데 덕이 없다. (2)
2009/07/12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아서 (1)
2009/07/05 우리는 예수님의 페이지 터너입니다. (2)
2009/06/28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2)
2009/06/21 명상은 기도가 아니다. (1)
2009/06/14 감자와 토란 (3)
2009/06/07 하나님 앞에서 긴장을 푸십시오. (2)
2009/05/31 개살구도 맛들일 탓 (2)
2009/05/24 서로 품고 서로 껴안기 (2)
2009/05/17 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 (3)
2009/05/10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6)
2009/05/03 어린이날에 우는 어린이들 (3)
2009/04/26 비비디 바비디 부 (3)
2009/04/19 거룩한 선택 (2)
2009/04/12 성경이 거룩할 수밖에 없는 이유 (3)
2009/04/05 사망의 이기심을 노래하자. (2)
2009/03/29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신가? (4)
2009/03/22 벼슬과 뿔 (2)
2009/03/15 나무에 올라가 생선을 구하다. (3)
2009/03/08 이론에 강할수록 실천은 멀어진다. (2)
2009/03/01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 (3)
2009/02/22 오직 예수 중심의 삶을 택하라 (3)
2009/02/15 첫 마음의 진성(眞性)을 잃지 말라. (2)
2009/02/08 제가 어찌 이 물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3)
2009/02/01 체리의 꿈 (3)
2009/01/25 소(牛)에게 배운다 (2)
2009/01/18 Jesus Touch! (3)
2009/01/18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1)
2009/01/04 섬기는 자들의 덕목 (6)
2008/12/28 크리스찬의 영원한 양식과 안식 (3)
2008/12/21 이기는 것 외에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할 일은 없다. (3)
2008/12/14 그까짓 금덩어리가 무엇이기에..... (1)
2008/12/07 공부(工夫) 좀 하십시오. (2)
2008/11/30 대통령과 종교개혁가 (1)
2008/11/23 잠자는 크리스채너티여, 분발하라! (1)
2008/11/16 버릴 줄 아는 용기 (3)
2008/11/09 신앙은 손가락 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
2008/11/02 당신은 담대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3)
2008/10/26 병든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위로 (4)
2008/10/19 가을과 모차르트 (3)
2008/10/12 에누 바이러스의 감염자가 되자 (4)
2008/10/05 칭찬도 배워야 할 복음적 예술이다. (2)
2008/09/28 하나님의 약속 (5)
2008/09/21 갚을 수 없는 빚 (3)
2008/09/14 인내는 희망을 품는 기술이다. (1)
2008/09/07 추석 -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1)
2008/08/31 거룩한 교회, 고상한 크리스챤 (2)
2008/08/24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1)
2008/08/17 누가 먼저 십자가를 질 것인가? (1)
2008/08/10 역설적 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2)
2008/08/03 나는 동바리 나무 토막 입니다. (3)
2008/07/27 성령의 마음, 성령의 사람들 (2)
2008/07/20 공허와의 전쟁 (1)
2008/07/13 중류(中流)의 지주(砥柱)를 보라 (3)
2008/07/06 온전(穩全)한 순종 (2)
2008/06/29 성령의 시대 (4)
2008/06/22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3)
2008/06/15 나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게 하소서 (4)
2008/06/08 누가 주를 믿고 따를 것인가? (3)
2008/06/01 교회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1)
2008/05/25 멋있는 크리스천이 됩시다. (1)
2008/05/18 그야말로, 당신은 인간이십니다. (4)
2008/05/11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시다. (1)
2008/05/04 잘 살려거든 거룩한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1)
2008/04/27 성령이시여, 나를 온전히 채우소서. (3)
2008/04/20 최후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3)
2008/04/06 혀를 다스려라. (4)
2008/03/30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4)
2008/03/23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 (1)
2008/03/16 내가 썩어야 향기가 난다. (2)
2008/03/16 왜 믿음이 자라지 못할까요?
2008/03/09 왜 믿음이 자라지 못할까요? (1)
2008/02/24 받은 축복을 헤아리며 늘 감사하자. (1)
2008/02/17 얄미운 기도, 경솔한 기도.
2008/02/10 죤의 믿음과 실천 (1)
2008/02/10 어떤 종류의 말을 사용하십니까?
2008/02/03 떪감을 주거든 연시를 만드십시오. (1)
2008/01/20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7)
2008/01/13 역경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든다. (7)
2008/01/06 사람에게 시간은 무엇인가? (7)
2007/12/30 네 가지 질문 (8)
2007/12/23 하늘의 향기를 땅에 내려주신 크리스마스 (1)
2007/12/16 타는 목마름으로! (5)
2007/12/09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7)
2007/12/09 가정예배는 경건의 모본이다. (6)
2007/11/25 디모데와 그 한가지 부족한것 (7)
2007/11/18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상품을 팔고 있다. (6)
2007/11/11 화상(火傷)과 동상(凍傷) (3)
2007/11/08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6)
2007/10/28 <말썽>보다 <말씀>을 세우십시오. (9)
2007/10/21 은혜는 언제 우리곁에 다가오는가? (9)
2007/10/14 [선데이칼럼]이제부터 교회는 미션(Mission)이다. (7)
2007/10/07 교회는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세워진 생명 공동체다. (4)
2007/09/30 너희가 이렇게도 깨달음이 없느냐? (10)
2007/09/23 생각하며, 감사하는 추석명절 (7)
2007/09/16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받고 사는 존재들이다. (12)
2007/09/09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10)
2007/08/26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13)
2007/08/19 예수님에 푹 빠지십시오. (16)
2007/08/12 믿음의 기도, 그 분이 누구십니까? (16)
2007/08/05 신앙의 실제적인 뿌리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10)
2007/07/31 패배란 마음의 상태에 불과하다. (10)
2007/07/22 장기판의 차(車)처럼 오만과 자만에 빠지면... (11)
2007/07/15 소르본 교회도 볼 수있습니다. (14)
2007/07/08 당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10)
2007/07/01 무엇을 찾으십니까? (4)
2007/06/24 못난이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이유 (5)
2007/06/17 바르게 지는 것이 옳게 이기는 길입니다. (13)
2007/06/10 당신은 하나님의 명기(名器)입니다. (7)
2007/06/03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6)
2007/05/27 나의 혀는 길고 손은 짧았나이다. (13)
2007/05/20 시련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17)
2007/05/13 왜, 그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잘 사는가? (4)
2007/05/06 더 무겁고 더 험한 십자가를 지십시오. (11)
2007/04/29 파충류만도 못한 인간들 (5)
2007/04/22 세 가지 종류의 성도들 (12)
2007/04/22 십자가를 누리십시요. (9)
2007/04/15 하필이면 왜 그 사람인가요? (10)
2007/04/08 주여,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10)
2007/04/01 당신의 삶을 통째로 바꾸고 싶습니까? (4)
2007/03/25 푸로소프 박사에게 배우십시오. (10)
2007/03/18 별것 다 기억하는 사람들 (6)
2007/03/11 저는 <친절한 죄인>입니다. (6)
2007/03/05 묶지만 말고 풀어야지요 (13)
2007/02/25 <게으른 부자>는 결코 용서 할 수 없다. (1)
2007/02/18 장로란 어떤 분인가? (7)
2007/02/11 지식(智識)인가? 잡식(雜識)인가? (8)
2007/02/04 복음의 열정(enthusiasm)을 가진 사람들
2007/01/28 베품의 손길보다, 불우한 자의 인격을 존중하라. (5)
2007/01/28 아침은 늘 새롭지만, 아첨은 언제나 괴롭다. (6)
2007/01/14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5)
2007/01/07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6)
2006/12/31 한해가 또 저물어 간다. (6)
2006/12/24 단순하게 믿으라 (12)
2006/12/17 십자가를 함부로 폄훼(貶毁)하지 마십시오. (11)
2006/12/10 하나님 앞에 겉과 속이 다름은 옳지 않다. (11)
2006/12/03 꿈꾸는 사람들만이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다. (7)
2006/11/26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8)
2006/11/19 한 장의 비누가 물에 녹으면 (10)
2006/11/12 시냇가에 심은 나무들 (9)
2006/11/05 예수님의 질문 (6)
2006/10/29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7)
2006/10/29 글쓰기의 어려움과 고통 (7)
2006/10/15 마귀가 실제로 있습니까? (5)
2006/10/08 마음의 소금을 간직하십시오. (2)
2006/10/01 하나님보다 높아 지려고 하는 죄 (8)
2006/09/24 하늘나라 일꾼을 뽑습니다. (7)
2006/09/17 생각하는 힘을 키우십시오 (6)
2006/09/10 책 좀 읽읍시다. (1)
2006/09/03 죤. 바리콘 (John. Barley Corn)씨의 가족을 아십니까? (11)
2006/08/27 어떻게 예술공연을 감상해야 합니까? (4)
2006/08/20 바보 같은 눈물, 바보 같은 인생 (6)
2006/08/13 부채로 성령의 바람을 불게하라 (10)
2006/08/13 문화선교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9)
2006/08/13 바라보면 벽이지만 밀고 나가면 문이다. (5)
2006/07/28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의 신앙적 의미 (4)
2006/07/28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5)
2006/07/28 “주여, 우리로 기도하게 하소서” (4)
2006/07/28 나 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5)
2006/07/28 故 윤덕수 목사를 기리며… (7)
2006/07/28 우리가 행복한 이유는 (5)
2006/07/28 크리스마스, 도데체 이게 뭡니까? (4)
2006/07/28 무엇을 <아멘>하십니까? (9)
2006/07/28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 (5)
2006/07/28 성문밖, 그들은 누구인가? (5)
2006/07/28 자식농사 (6)
2006/07/28 설교가 예배의 주 요점은 아니다. (7)
2006/07/28 영안이 밝아야 한다. (3)
2006/07/28 너의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5)
2006/07/28 Poison이냐? Poisson이냐? (6)
2006/07/28 주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5)
2006/07/28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섭리의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 (4)
2006/07/28 지금 네가 어디 있는냐? (5)
2006/07/28 쉬지 말고 기도하라
2006/07/28 주기도문을 드릴 때마다
2006/07/28 더러 알아도 모르는 척하라 (4)
2006/07/28 정말, 죄송합니다.
2006/07/28 신앙도 날씨에 따라 변하나? (5)
2006/07/28 자 화 상 (10)
2006/07/28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운 것은 (3)
2006/07/28 오늘은 당신에게 최고의 선물 (5)
2006/07/28 바캉스가 가져온 그늘 (4)
2006/07/28 올림픽 챔피언과 하늘의 면류관 (5)
2006/07/28 故김선일형제-사막에 뿌린 선교의 피 (4)
2006/07/28 누가 그를 우는 갈대로 만들었는가? (6)
2006/07/28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 (5)
2006/07/28 신앙은 대물림 아니다.
2006/07/28 고요한 가운데 ,찾아라 (5)
2006/07/28 문화선교와 새로운 도전들 (5)
2006/07/28 사랑의 거리, 은혜의 공간을 넓히자 (6)
2006/07/28 어른이 없다.
2006/07/28 강도의 십일조 (6)
2006/07/28 정치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무엇일까? (11)
2006/07/28 주여,어찌 하오리까? (6)
2006/07/28 우리교회가 아름다운 까닭은⑬ 이름도, 빛도, 소리도 없이 섬기는 자들
2006/07/28 우리교회가 아름다운 까닭은⑫ 이 잔잔한 감동을!(2) (3)
2006/07/28 우리교회가 아름다운 까닭은!보수와 진보가 다함께(1) (4)
2006/07/28 인터넷 토론문화에 대해 (9)
2006/07/28 제주산 은갈치의 고백 (5)
2006/07/28 무엇이 “하나님의 뜻” 이란 말씀입니까? (4)
2006/07/28 한국 부채로 <빠리>의 더위사냥하기 (4)
2006/07/28 헤어질때와 만날때의 인사 (3)
2006/07/28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예수도 잘 믿는다. (5)
2006/07/28 지금은 결단하고 선택할 때이다. (6)
2006/07/28 <매너>가 무너지고 있다. (4)
2006/07/26 "기도하라!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5)
2006/07/26 네 행위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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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는 소리 있어 기쁘다.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9/05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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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피의 기록인 “형장명상록” (1987 독일어판)을 읽으면서 찬송과 노래는 기쁜 사람들만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박해, 핍박속에서도 찬송은 힘이요 위로요, 간증이며 영생을 찬미하는 소망임을 알게 된다. 빌립보성 감옥에 갇힌 囹圄의 몸이었던 바울과 실라는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린 만큼 힘찬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했다. (행16:25). 겟세마네의 고뇌와 골고다의 뜨물같은 치욕을 미리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도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마26:30). 성서해석학자 R. E Prothero 의 증언에 의하면, 카타콤의 성도들은 수난의 하루가 열리는 아침이면 시편73편을, 그 괴로운 하루가 닫히는 저녁이면 시편14편을, 공포의 위협이 몰려오면 시편 42편을 연독했었다고 말한다. 고난의 생활을 찬미로 극복해 나갔다. 신앙의 전사, 종교개혁의 대 선구자 존 위클리프 역시 순교의 최후순간에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시118:17) 고 노래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1415년 6월 6일 믿음의 용사 <요한 허스>는 교회를 모독한 이단이요, 악마라고 써붙인 모자를 쓰고 <지기스문드>왕 앞에 섰다. “아직도 기회는 있다. 네 소신을 취소하겠는가?”라고 왕이 묻자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시편31편을 노래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지 말게 하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의 보장이 되소서. |
이렇게 노래를 올릴 때 그의 쇠약한 육체는 불이 붙었고 그의 영혼은 하늘나라로 옮겨갔다. 종교개혁가 마틴루터는 고난과 핍박의 질곡속에서도 지독한 시편애독자 였다. 루터는 시편118편, 4편, 110편, 2편, 46편을 특별히 사랑했다. 루터의 처절한 영적싸움에서 항상 용기를 복돋우어 주던 시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지은 시편48편이다. “나를 단죄하기 위하여 Worms국회에 모인 악마의 수가 그 건물의 기왓장 수만큼 많다 할지라도 나는 단연코 가리라.” “산이 비록 바다로 옮겨 빠질지라도 나는 겁날 것이 없다.” 이 모든 루터의 투지와 용기는 시편46편의 찬송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신앙인에게 믿음의 삶을 더욱 굳건히 지키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찬송이다. J. 샌더스 (Sanders)의 변함없는 증언 처럼, “찬송은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을 돌리는 의지(Will)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거나 내 놓을 것이 없는 우리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찬송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받은 축복에 대해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양을 부요하게 해드릴 수 없으나 그의 이름을 찬송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그의 영광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시편기자와 함께 찬송에 동참할 수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시103:1) 믿음의 길은 피로 얼룩진 순교의 길이다. 언제나 극복해야 할 장애와 뛰어 넘어야 할 어려움이 많다. 믿음 생활은 언제나 위험과 위기를 수반한다. 믿음 생활은 항상 저항에 부딪힌다. 믿음 생활은 언제나 선택에 직면한다. 지금으로부터 23년 20일전에 필자에게도 극렬한 풀무속의 시련과 눈물이 있었다. 슬픔속에서도 내가 찬송할 때 소설가 이범선은 “울지 못해 부르는 노래”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주님 시련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최대의 영적축복이 아니겠지요?” 코엘류는 <피에트라 강가에서 울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서 찬송했다.> 나는 그 때 비로소 비극의 눈으로 기쁨의 넓이를 잴 수 있었다. 찬송하는 소리있어 나는 언제나 기쁘고 행복하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찬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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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는 눈멀고 벌거벗은 거지들입니다.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8/29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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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화가 홀만 헌트(Holman Hunt)가 1853년에 그린 유명한 그림 “세상의 빛”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이 작품의 원화는 영국 옥스퍼드 케블대학안에 있는 예배당에 걸려 있습니다. 그 모사화(模寫畵) 역시 성바울성당에 걸려 있습니다만 그것은 40년후 헌트 자신이 그린 그림입니다. 비록 라파엘 이전의 화풍이긴 하지만 이 그림이 상징하는 교훈은 엄청나게 크고 높습니다. - 예수님께서 왕의 옷을 입고 가시면류관을 쓰셨으며, 왼손에는 등불을 들고 오른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요한계시록3:20 그렇습니다. 지금 당신의 문 밖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요한을 통하여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내는 말씀 끝부분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현대위치, 터어키) 는 안티오쿠스 2세가 건설한 소아시아의 부유하고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직물산업과 브루기아 가루 안약으로 유명한 의과대학, 그리고 부유한 은행들로 널리 알려진 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 성읍이었습니다.① 그러나 이 도시의 문제는 <부럽거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물질적 풍요와 배부름이 문제였습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다는 <자기만족>이 교회안까지 침투했습니다.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있긴 했지만, 이름과 허울뿐인 그리스도인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즉흥적이며, 일시적이고, 얕고, 취약했습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영적 미지근함을 혐오하시다 못해 “내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요한계시록3:16, 라고 까지 극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이기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요한계시록3:17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교만하고 오만한 라도디게아를 향해 퍼 부으신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내리신 더 위험한 경고의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라오디게아 (Laodicea)의 교만과 물질적 풍요는 영적미지근함을 낳고, 그것은 끝내 <자기기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멀고 헐벗은 거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도 방직공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었습니다. 제아무리 브루기아 안약이 탁월해도 눈이 멀었습니다. 금고에 가득찬 돈을 가진 은행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거지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립고 부족한 것이 없다”는 자기 충족감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는 거짓독립심이 우리의 영혼을, 오늘의 교회를 그리스도께 의탁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지적인 믿음을 신뢰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적인 확신이 인격적인 의탁으로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영적 미지근함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 토록 오랫동안 <양다리 걸치기>를 하게 만듭니까? 가령 제가 장로로서 학자로서 기독교적 양육과 훈련을 잘 받았고 그리스도의 신조와 그리스도인의 행동기준을 받아드렸다고 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사람들처럼 -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나는 이미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벌거벗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진리에 대해 눈이 멀고 하나님의 은총을 살 돈이 없는 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난 우리를 자신의 의로 옷입히시고 우리의 눈을 만져보게 하시며, 영적인 부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확실히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들이기 전까지는 우리는 눈멀고 벌거벗은 거지들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지금도 주님께서는 기다리며 말씀하십니다. 문을 열어 드리십시오. ■ 참조 : ① John R. Stott Basic Christianity (London, Eng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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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8/22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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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사역의 1/3이 실패였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놀라고 화를 내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신학적 의미 그 이상의 것이다. 예수님은 평소에 어린아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지극하셨다. ■(마18:1-4, 막9:35-37, 눅9:46-4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차례씩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겸손하라고 역설하셨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여전히 교만하고 자만하며 입이 걸고 큰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현장학습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서로 다투지 말고 절제하라고 사랑과 양보 희생의 정신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 요한 마저도 그의 별명 “우뢰의 아들” 답게 끝까지 거칠고 경솔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 정확히 <베드로가 쓴 첫 번째 편지>를 읽어가다 보면, 구구절절 겸손, 그리고 겸양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그 뿐인가 <요한의 편지>에도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이렇게 몰라보게 달라졌을까? 그 토록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대로 놀아나던 그들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 때문이다. 안으로 부터의 변화, 속으로부터의 다시 태어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열두제자를 은밀히 다락방에 불러 모으시고, 돌아가신 후 자신을 대신할 보혜사(Paraclete) 즉 <진리의 성령>에 관해 이야기 하셨다. 그런데 말씀 도중에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오히려 너희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을까?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요16:7) 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에게 유리하고 유익한 점이란 것이다. 왜냐하면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그들, 제자 <곁>에서 그들과 <함께> (with) 있을 뿐이지만 저(성령)는 너희<안>, 너희 속에(in) ■(요14:17)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① John R. Stott. Christianity 하나님의 계시의 새로운 양상은 오순절날 불같이 뜨거운 사람들로부터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다(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행2:4).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가 탄생 하신것만큼 놀랍고 새로운 사건이요 역사였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8)는 어떤 특정한 성자나 탁월한 사도나 목사나 장로를 위한 특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전 성도를 향한 명령이시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생득권이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만일 성령께서 우리 안(in)에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8:9) 고 단언 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 자신을 맡겨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면 성령께서 우리안에 들어오신다.” ② Stott 예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와 함께(with)보다 우리 안에(in)사셔야 나도 예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그때부터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 - 육체와 성령의 싸움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날마다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날마다) 대적함으로...” (갈5:17)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육체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단호한 거부를 통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우리의 정(情)과 욕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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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상징색(色)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8/15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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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에바 헬러 (Eva Heller)는 사회심리학분야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사숙해온 학문적 파트너이다. 나 보다는 열두살 아래인 1948년생 띠 동갑 이지만, 그녀가 1989년에 쓴 “색이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책은 <색체 사회심리학>에 관한 책중에서 세계최고이다. 색 (色), 신비한 색체의 세계에 관한한 필자의 관심은 에바 헬러나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미셀 투리니에>등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투루니에는 그의 철학적 에세이에서 보라, 남색, 파랑, 초록, 노랑, 주황, 빨강 등...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일곱가지 색깔들을 빛이 혼탁한 곳을 통과할 때 빛이 지닌 일곱가지 고민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아주 어릴 때 - 그야말로 순진난만하고 단순무구 했었던 원래의 일곱가지 영혼이 살아가면서 점점 혼탁해진 <일곱가지 죄악>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빛의 색’이란 것은 그 의미가 <전이>되면서부터 ‘깨달음의 색’ 이 된다. 고대 유럽의 상징학에서 노랑은 이성의 색, 파랑은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정신의 색, 노랑은 이성을 나타내는 머리의 색, 하나님의 상징은 ‘눈’하나를 노란 삼각형으로 그려졌다. 그 밖에도 빨강은 사랑과 증오, 흰색은 청결, 파랑은 그리움, 노랑은 웃음소리로 상징되기도 한다. 해마다 대학에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대학교수들이 학위복을 입는다. 교회에서도 성례를 집행하거나 거룩한 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교수들이나 성직자가 입는 학위복이나 성례용 까운이나 후드를 보면 그들이 속한 학부나 신분을 이해할 수 있다. 의학부 - 밝은 빨강 - 피의 색. 법학부 - 어두운 빨강 - 죄를 진 피의 색. 철학부 - 파랑 - 정신의 색. 신학부 - 보라 - 교회의 색. 경제학, 사회학부 - 녹색 - 성장과 성공의 색. 자연과학부 - 노랑 - 이성과 탐구의 색 등이다. 색은 그들에게 신분이요. 그들이 속한 주소였다. <빛의 색>을 <깨달음의 색>으로 이해할 때, 도대체 기독교의 상징색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대에 따라 나타내는 색채와 감성의 변화를 그려온 기독교 회화사 에 나타난 상징색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색은 무엇일까? 원칙적으로 파랑은 마리아, 빨강은 예수님, 퍼플보라는 성부, 녹색은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 - 다시 말하면 성부는 가장 고귀한 색인 보라 띤 빨강을 입고, 예수는 빛나는 빨강을 입으며, 마리아는 파랑을 입는다. 성령은 하얀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성령의 상징색인 녹색을 배경색으로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늘 날까지도 검정색 만을 유독 기독교 성직자들이 통계학적으로 즐겨입는 배경은 무엇일까? 검정은 중세의 색인가, 개신교의 색인가? 보수의 상징, 교회의 색인가? 권위자의 색인가? 그 유례를 정확히 알고 싶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설교 때 유색제례복을 입지 않았다. 루터는 검은 옷을 입고 설교했다. 루터가 설교 때 유색 찬란한 고가의 제례복을 입지 않은 까닭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였다. 루터가 당시 입었던 장식이 없는 검정설교복은 당시 가장 평범하고 서민적이었던 민초들의 일상적 겉옷이었고, 당시의 복식규정에서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옷 색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므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검정옷을 입었을 뿐이다. 루터의 검은 설교복은 시민적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검정이든, 흰색이든, 회색이든 교회의 색은 모름지기 특권이나 우월성의 상징이 아니라 섬김에 근거한 하나의 순종과 책임의 색이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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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감옥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8/08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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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불행하게도 당신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다. 수의를 걸치고 가슴에 번호를 단 체로 눅눅한 지하 감방의 햇살 없는 어둠속에서 당신의 생애를 통틀어 당신의 마음가지기 (Gesinnung)를 허물어 온 그 비열한 족쇄(足鎖)에 채우인 체로 ‘놓아 달라고 몸부림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삶 전부를 가둔 그 부자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육신을 마비시키며, 당신의 영혼을 끝없이 질질 끌고 다니는 인간의 감옥 -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철학자<데카르트> 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대는 누구인가? <인간이 만든 감옥>에 대해 이런 고백을 남겼다. “오랫동안 포로가 되어 왔던 나의 불쌍한 영혼이여, 이제 너의 그 지독한 감옥으로부터 빠져나갈 때가 닥쳤노라, 어서 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빠져 나가라. 기쁨과 용기로써 이 찢어져 나가는 아픔을 참고 견디리라.” 인간의 영원한 원수인 그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 스스로 만든 당신의 감옥이다. 감옥은 범죄자로 의심되거나 고소되거나 유죄가 확정된 자들만이 어두운 창살속에 갇히는 곳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 큰 것에 의해 용납(acceptance)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불편한 마음 상태가 바로 감옥이다. T.S 엘리옷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사람들이 <자유로운 인격>이 되지 못한체로 죄의 볼모로 잡힌 “인간의 감옥 여섯가지 유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① 자기도취의 감옥이다. - 제 잘난 맛에 취하고 빠진 나머지 그 도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② 절망의 감옥이다. - 세상을 항상 부정적으로 보고 불평불만하며 절망한다. ③ 비판의 감옥이다. - 언제나 다른 사람의 흠과 단점만을 꼬집고 비판하기 좋아한다. ④ 옛날의 금잔디식 감옥이다. - 일명 <과거지향의 감옥>이다. 옛날 그때가 그립고,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한다. ⑤ 선망과 비교의식의 감옥이다. - 내 떡, 내 사람의 소중함과 귀함을 모르고 남의 떡, 이웃집 그 사람만 크게 보인다. ⑥ 질투와 증오의 감옥이다. - 남이나 이웃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괜히 샘나고, 배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진다. 이 모든 것들이 슬픔을 증폭시키는 비열한 능력들이다.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한결 같은 가르침은 ‘한 쪽 뺨을 치거든 다른 편도 내어 대라’는 <적극적 용납됨> - “자유로운 인격이 되라.” 는 <마음가지기>이었다. 신앙은 내 안에 <불가능의 고약함> 을 해방 시키는 것이다. 즉 죄의 감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즉 이스라엘을 그 속박으로 부터 구원하시고, 속량하시고, 이끌어 내신 하나님은 생명에로 인도 하시려고 그, 엄청난 댓가를 치루신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속 (Redemption)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당신은 남을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크게. 이미 용서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주기도문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22 당신은 용납되었다. 당신보다 큰 것에 의해서 용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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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종으로서의 자리뿐이다.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8/01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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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자기네 패 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질 - 자중지난 (自中之亂)에 빠지며, 국내외 여론으로부터 따가운 지탄과 비난을 받아 온 레블뢰 군단 프랑스가 신임사령탑으로 로랑블랑감독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프랑스 축구협회(F.F.F)장 피레 회장은 당부의 말에서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아로 새겨야 할 귀중한 명언을 남겼다. “모든 문제는 평소의 마음가짐(habitual mental attitude)이다. 언제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들의 마음이 문제다. 블랑감독은 아주 큰 책임을 지게 되었다. 프랑스 대표팀은 도덕적으로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며 지난날의 실패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때는 프랑스 국민이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축구단의 자중지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감독이나 선수 모두가 자기 명성이나 역할에 걸맞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다” 고 불평하기 때문에 티격태격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무시 당했다. 명성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은 윗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 때문에 밀려났다. 내 명단이 올랐어야 할텐데 빠졌다. 감독이 문제다. 지단이 조종한다.”... 축구는 11명이 한팀, 한 마음이 되어 승부를 다투는 단합일치의 경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나 감독이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 대우. 명예. 인기...만을 고집한다면 그 팀은 밀가루, 콩가루 팀이다. 축구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레블뢰군단 프랑스국가대표팀을 생각하는 동안, 필자는 문득 이것이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의 이미지와 너무 흡사 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세월동안 한국교단과 교회들은 하찮은 자리 논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탕진했었다. 권위나 명성의 직위를 올리고 내리는 문제로 티격태격이 일어나고 목사위치가 높으냐, 장로 자리가 낮으냐등 자신들에게 알맞은 자리다툼으로 갈등과 분열이 고조되었다. 도대체 교회 안 밖에서 조차 그리스도인이 차지해야 할 자리가 왜 그렇게 필요이상으로 많이 필요한 것일까? - 그리스도인이 차지해야 할 자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바로 그 자리는 섬기는 종으로서의 자리뿐이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마가10:43,44 또한 그 자리는 예수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 - 사람들의 발을 씻는 자리였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 요한13:14라고 요구하신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가 ‘나’를 우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교회가 ‘나’에게 최소한의 감사와 인정을 해주지 않는 다고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은 교회를 인간적으로 줄 곧 생각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서 조차 자만심 운운한다면, 당신은 실패한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에는 인간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애써 일하는 사람들이 앉거나 차지해야 할 자리가 하나도 없다. 그런 자리나 예우가 필요한 사람은 지금이라도 세속의 세계로 나가는 편이 좋다. 교회는 예수님 외 - 그리스도인이 차지해야 할 자리가 없다. - 오직 종으로서 섬기는 자리, 발을 씻어주는 자리뿐이다. 만약 당신이 인간적 대접과 영예가 필요하다면 되도록 빨리 교회를 떠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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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7/25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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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활동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예배보러 가는 것>과 <예배에 참석하는 것>, <예배에 출석하는 것> 그리고 <예배드리러 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도대체 예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예배를 드리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예배에 대해 목마르게 하는가? 예배 - (Worship / Gottesdienst) 는 신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존경하며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결단하는 신앙공동체적 행위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부터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대중예배의 장식과 의식을 지나치게 멋있게 보다 예술적으로 프로그래밍 하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예배드리러 오는 신도를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儀式(의식)은 살고, 예배는 죽었기 때문이다. <챠드 월쉬>는 “21세기의 덜 자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의 신앙활동은 희미한 경건이며 거룩한 잠꼬대다. 신앙은 지성과도 분리되었고, 의지와도 멀어진 감정적 흥분상태에서 감상적인 자장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 예배는 예배의 정신 - 예배의 참뜻이 살아야 진정한 예배이다. 예배를 예배답게 이루려는 마음가짐 -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어떠한 예전(禮典, Liturgy), (예배행사)나 <형식>도 결코 예배를 위한 근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예배에 있어 의식(儀式)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예배의 참뜻, 정신을 살려주는 한낱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가 목적이 되면 예배는 죽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야 하는가? “예배보러”, “예배 참석하러”, “예배 출석하러”가서는 안 된다. 뛰어난 신약학자요 하나님 말씀의 능통한 해설자인 위리엄 바클레이 (Barclay)는 이렇게 예배를 준비하면 -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세 가지 큼직한 조건을 제시하며 약속했다. ① “예배를 위해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갖춘 후 교회로 가십시오.” - 주일 날 ‘서둔다’는 말은 신도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자세요 표현이다. 예배를 위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서둘러’출발하고 ‘서둘러’ 이미 예배시간이 시작한 뒤에 허둥지둥 겨우 자리에 앉는 것 부터가 예배를 통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예배전에 미리 마음을 쪼개여 옥합을 드릴 준비를 하라. ②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면서 교회로 가십시오” - 교회가는 일이 고통과 부담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에 임하는 일이 단순한 습관, 무거운 의무감, 희미한 경건의 표시로 일관 된다면, 당신은 예배에 실패하고 만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믿음에 성공하려는 비결은 도대체 나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고 사모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그런 마음이 바로 예배정신이다. ③ “나의 모든 것을 바칠 결의를 품고 교회로 가십시오.” - 구약성서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예배의 형태는 희생이었다. 우리가 교회에 갈 때 무엇인가 얻을 생각만 하면서 나의 기도, 나의 재물, 나의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드릴 결단을 안고 교회로 가야한다. 비록 우리는 육신만을 가지고 교회에 갈지라도 믿음과 사랑과 헌신과 기도를 가지고 간다면 그 예배가 얼마나 아름답고 살아있는 제사가 될까! 예수님은 예배를 신령과 진리로 드리라고 가르쳤다. 형식과 의무로써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과 내면적 주체성으로써 예배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예배의 참뜻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예배이어야 하는가? 예배는 우리의 <역사속의 사건>이다. 우리들 이웃에 사는 지극히 작고 억눌리고 멸시받는 버림받은 <여리고의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 가서, 그들을 돌보고, 사랑하겠다는 결단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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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삶을 위하여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7/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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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은 정해진 기회나 때마다, 어떤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의 의무들을 하나님의 영광에 걸맞는 원리를 따라서 이행하는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경건>은 도덕이나 윤리 신앙적 고백 이상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을 섬기며,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을 행함으로써 자기의 일상적인 삶의 모든 부분들을 경건의 영역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편은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친절을 경험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시4:3)라고 정의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는 거룩하게, 신앙생활은 겸손하게, 신앙활동은 고상하고 지혜롭게 하면서도 진즉 세상밖에 나가 일주일간의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실망스럽다 못해 하나님을 속이고 크게 모독하는 것 같아 얼굴을 들 수 없다. 당신들은 예배시간이나 교회라는 장소에서는 성자처럼 거룩하고, 온유하며 매우 인자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의식이 끝나면 예배당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사람처럼 함부로 말하고 멋대로 행동한다. 예배를 드린 후의 여러분의 삶의 방식, 교회를 떠난 한 주간동안의 삶을 영위하는 그대들의 모습을 살펴 볼 때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경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는 교회는 성도로 하여금 “영적으로 깨어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순례자의 삶을 영위하라”고 가르친다. 서로가 서로에게 권면하여 하늘의 감동을 받는 삶을 살도록 하라고 당부한다.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잘되고, 복받고, 성공하며, 유익해지는 <개량적 세상성공법> 또는 삶의 어떤 품격을 전하고, 찾고, 얻고,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은혜나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적 집회소가 아니다. 죄로 오염되고, 갈등으로 얼룩지고, 악으로 범벅이 된 우리의 삶과 인생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것인가에 대해 해답을 주는 종교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만이 줄 수 있는 우월성이다. 그렇다면 날마다 경건한 삶을 위하여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정신과 다르게 사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 당신의 신앙의 <허위의식>, 즉 <이방적인 삶에 그리스도인 경건을 가미한> 것부터 청산해야 한다. 구절마다 이렇게 촉구한다. 이렇게 강조한다. - “십자가의 자의식을 가지고 살라”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고, 애통의 복을 고백하고, 심령의 가난함의 복락을 추구하라. 교만과 풍부의 허무함을 버려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즐거워하라.” “육체의 정욕을 물리쳐라,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라.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한 것같이 사람을 사랑하라,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려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한 영광으로 통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향해 가르치고 외치는 예수님의 경건이다. 기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면서, 삶은 이방인 같이 영위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멸하고 모독하는 행위이다. ■ 윌리암 로오의 <경건한 삶>을 추모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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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서캐디안 리듬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7/1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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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간대가 다른 뉴욕이나 빠리, 푸랑크푸르트 등 다른 나라에 가게되면, 비몽사몽간에 쉬 피로해 지고, 휘청거리며, 불면증 같은 현상을 겪게 된다. 이른바 제트레그(jet leg) 증상이 바로 그것이다. 심한 경우 온몸에 열이 나거나 한기, 복통, 두통,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렇게 순하던 사람도 짜증을 내고 금새 녹초가 되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생물은 저마다 몸속에 수면, 아침기상, 배설, 심박수, 혈압, 체온을 조절하는 생물학적 시계가 있다. 이것들이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는 생물학적 기능은 24시간 주기의 <circadian Rhythms, 서캐디안 리듬>에 맞춰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체내리듬이 단 몇 시간이라도 어긋나면 그 반응이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제트레그 증상은 장거리 비행기 여행과는 아무런 연관도, 상관도 없다. 다만 우리 몸의 정상적인 리듬이 깨져서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다. 서캐디안 리듬 - 서캐디안(Circadian)이라는 단어는 (하루 쯤)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기능은 24시간 하루에만 국한 된 것일까? 필자는 생물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 하루 24시간 이상 - 주, 월, 봄, 여름, 가을, 겨울 주기로 생체기능을 활성화 시킨다고 믿고 있다. 신앙생활에도 생물학적 시계가 있다. 이른바 영적 서캐디안 리듬이 고도로 훈련된 생애주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활성화된다. 그것은 대리직(deputyship) 으로서의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충성하며, 전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 때, 하루 24시간이 아닌 전생애적인 서캐디안 리듬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마치 포유동물의 체내시계를 운행하는 시교차상핵(suprachias - matic nucleus : scn) 처럼 그 때 그 때 새로운 변화에 맞추어가면 평생을 주기로 구분해 우리의 신앙생활 활동을 활성화 시킨다. 창조적 신앙인에게 신앙적 서캐디안리듬은 생물들의 체내시계처럼 전례와 관습, 반복 같은 것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흐르는 물처럼 스스로 고이고, 차며, 흘러 넘치듯 스스로 굽히고 적응함으로, 더 힘차게 흘러 보혈의 바다에 이르게 된다.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주일을 지키지 못할 때, 하루 종일 불편해 지는 심기와 고통을 느낀다. 주일 아침이면 알람시계의 도움없이도 예배시간에 정확히 맞춰 정시에 일어나게 된다. 말씀을 주기적으로 읽지 못 할때, 느끼는 영혼의 지독한 공복감이며, 기도 할때 충만해지는 행복감, 그 기쁨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안 먹고 안 마셔도 절로 배부르고 기쁘다. 신앙인의 두뇌에는 영적체온, 영적체액, 영적배고픔, 영적갈망등을 주관하는 시교차상핵같은 영적체내시계가 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인생의 고통, 눈물, 탄식의 증상은 삶의 기나긴 여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영혼의 정상 리듬이 깨져서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다. 한결한심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영적 서캐디안리듬을 잃지 마시기 바란다. 신앙생활의 요체는 일관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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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신앙고백과 그 교훈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10/07/04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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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기차로 약 두 시간을 신나게 달리면 스위스의 수도<베른>이 나온다. <취리히>나 <제네바> 보다는 훨씬 작은 도시이지만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옛 시가지 중심의 어느 허름한 4층 건물에 들어서면 20세기 과학에서 가장 혁명적이라는 작품<특수상대론>을 발표한 독일계 미국 이론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말년에 하나님을 영접하며 창조주 앞에 지극히 작은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나보다 더 궁금해 하는 이런저런 과학적 현상이나 스펙트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연구해 왔으니까요. 이제 나는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 하셨는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사소하고 자질구례한 일 일 뿐입니다... 큰 깨달음(more knowledge) - 더 많은 지식과 과학 (more science)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아인슈타인은 본래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이 아는 과학”을 통하여 “더 많이 모르는 지혜”의 한계를 시인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과학은 기능적 지식이나 정보 보따리에 불과 하다. 바로 그 한계를 깨닫는 순간부터 새로운 <근원적 지식>에 대한 뜨거운 질문이 시작된다.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는 손끝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며 “굳이 학문이라고 까지 말 할 수 있을까... 나의 학문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 걸 세.” 라고 겸손히 말했다. 궁극적으로 바다보다 더 넓고 더 큰 절대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인슈타인 같은 (큰 과학자)에게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새롭게 헤아릴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주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작은 과학>의 단계를 뛰어 넘어서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존재를 전적으로 의지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지식과 지성에도 여러 가지 Level이 있다. 베이컨의 말을 빌리면... “약간의 지식과 과학” (a little sciencer)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그러나 “더 많은 지식과 과학” (more science)은 오히려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아오게 만든다. 데카르트. C. S루이스. 베이컨. 베토벤. 세익스피어.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참된 지식과 과학은 알면 알수록 창조신앙과 영성을 풍부하게 해 준다. 어느 유명한 문학평론의 때늦은 깨달음처럼, 요즘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하나님께로, 다시 그리고 새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 작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리석게도 사람은 <약간의 과학> 에 의지하여. 하나님 찾는 일을 게을리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주님께서는 비난자들에게 감동적인 약속을 변함없이 외치고 계신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마7:7) 얼마나 가슴 설레는 초청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찾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는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 (렘29:13)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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